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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사291

여주 연양리 구석기유적 아파트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터파기 공사가 진행되던 중 세종대학교 박물관이 발견하였다. 이후 기전문화재 연구원이 2004년 5월부터 8월까지 시굴조사를 하고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약 1만 1551㎡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 크게 2개의 지점(약 2,575㎡)에서 구석기시대 석기들이 집중적으로 묻혀 있음이 나타났고 이를 토대로 2004년 9월부터 2005년 4월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이후 하부토양쐐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적갈색 점토층의 상부에서 1,782점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하부 토양쐐기가 약 6만 5000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미루어 유적은 그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석기의 종류는 몸돌, 격지, 부스러기, 모룻돌, 자갈돌, 찍개를 포함한 연모 등인데, 대부분이 석기 제작과 관련되어 있고 몇.. 2024. 2. 28.
여주 파사성 토기항아리 파사성은 여주시와 양평군의 경계를 이루는 파사산(해발 200m) 정상의 능선을 따라 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남한강과 이포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파노라마 뷰 맛집으로 여강길 8코스인 파사성길 트레킹 코스이자 사진 출사지로 소문났다. 신라 제5대 임금인 파사왕(재위 80~112) 때 처음 쌓은 것으로 전하며,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류성룡의 발의에 따라 승장 의엄이 승군들을 모아 성을 늘려 쌓았다고 한다. 고려 말 목은 이색과 조선 중기의 유성룡이 파사성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시로 남길 정도로 전망이 아름답다. 둘레 약 943m, 성벽 중 최고 높은 곳은 6.25m 낮은 곳은 1.4m로 성벽은 비교적 정연하게 쌓았고, 신라시대에 축성된 부분과 조선시대에 개축.. 2024. 2. 28.
여주 중암리 갑발 도자기를 구울 때 담는 큰 그릇. 갑(匣)이라고도 한다. 고온에 잘 견디는 점토(粘土)로 만든 원기둥형 그릇이다. 도자기를 구울 때 가마 안의 이물(異物)이나 재가 떨어지는 것을 막고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준다. 고려 초기 청자요(靑磁窯)에서부터 사용되어 조선 말기까지 사용되었다. 그 형태는 점차 커졌으며 조선 시대에는 갑의 뚜껑이 제작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2024. 2. 28.
훈민정음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목판본으로 2권 2책이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다.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에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한 《훈민정음예의본》과,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月印釋譜)》 첫권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 널리 알려졌으나, 후자에 대하여는 1940년 발견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의 형체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구구한 억설이 있었으나, 이 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발음기관 상형설(象形說)이 제자원리(.. 2024. 2. 26.
용비어천가 목판본. 10권 5책. 1445년(세종 27) 4월에 편찬되어 1447년(세종 29) 5월에 간행된, 조선왕조의 창업을 송영(頌詠)한 노래이다. 모두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로서, 한글로 엮은 책으로는 한국 최초의 것이다. 왕명에 따라 당시 새로이 제정된 훈민정음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권제(權踶) 등이 짓고,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 등이 주석(註釋)하였으며, 정인지가 서문(序文)을 쓰고 최항(崔恒)이 발문(跋文)을 썼다. 내용은 조선 건국의 유래가 유구함과 조상들의 성덕을 찬송하고, 태조(太祖)의 창업이 천명에 따른 것임을 밝힌 다음 후세의 왕들에게 경계하여 자손의 보수(保守)와 영창(永昌)을 비는 뜻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장(每章) 2행에 매행(每行) 4.. 2024. 2. 26.
석보상절 1447년(세종 29) 수양대군과 김수온(金守温) 등이 석가모니의 가계와 그 일대기를 편역한 책. 책의 명칭 및 편찬동기와 간행시기, 그리고 편자에 대해서는 《월인석보》(별항) 권1에 있는 와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즉 서명의 '석보'는 석가의 일대기, '상절'은 요긴한 것은 상세히, 요긴하지 않은 것은 생략한다는 뜻이고, 편찬동기는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고 대중을 불교에 귀의하게 하기 위한 데 있으며, 내용에 관해서는 에 승 우(祐)와 도선(道宣)의 《석가보》 · 《석가씨보》를 참고로 한 책을 만들어 이를 번역하여 만들었다고 했으니, 번역에 앞서 한문으로 된 책(漢文抄稿)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석보상절》을 보면, 위의 두 《석가보》 외에도 《법화경》 · 《아미타경》 등 여러 .. 2024. 2. 26.
상아로 만든 휴대용 해시계 조선 후기에 강건(姜健)이 만든 휴대용 해시계. 1986년 3월 14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해시계 중 가장 작고 정밀하고, 뛰어나다. 앞면을 반으로 갈라 위쪽은 방향을 가리키는 지남침(指南針)을 넣어 나침반을 만들고, 아래쪽은 움푹 들어간 반구형(半球形)의 원시반(圓時盤)을 만들었다. 나침반 둘레에는 12지(支)와 12간시(間時)가 교대로 새겨져 있다. 원시반 안에는 시각선(時刻線)을 새겼으며, 북극을 향하여 비스듬히 시표(時標)가 세워져 있다.또, 오른쪽과 왼쪽 측면에서는 24절기를 새겨 놓았고, 아래쪽 측면에는 “北極高三十七度三十九分十五秒…”라는 글귀로, 1713년(숙종 39) 서구 도법(度法)에 따라서 측정한 한성(漢城)의 북극고를 표시하였다. 뒷면에는 “同治辛未年(1874년) 孟夏下澣 晋.. 2024. 2. 26.
규표 표는 지상에 수직으로 세운 막대이고, 규는 표의 아래 끝에 붙여서 수평으로 북을 향하여 누인 자[尺]를 말한다. 표(表)는 얼(臬)·비(髀)·기타 여러 가지 이름으로도 일컬어졌는데 태양에 의한 표의 그림자[影]를 측정하여, ① 방향(方向) 결정, ② 절기(節氣)와 1년[回歸年]의 길이 결정, ③ 시각(時刻)의 결정, ④ 지역(地域)의 한계 결정 등에 사용되었다. 규(圭)는 정오 때 표의 그림자를 정확히 측정하여 정확한 절기와 1년의 길이를 결정하는 데 쓰였다. 표 또는 규표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고안된 천문학적 측정기구로서 이미 주나라 이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최고의 규표는 중국 장쑤성(江蘇省)의 동한(東漢)시대의 묘에서 출토된 동규표(銅圭表)이다. 《주비산경 周髀算經》에 따르면 고대에는 표의 높.. 2024. 2. 25.
혼천의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구실을 하였던 기구로 선기옥형, 혼의, 혼의기라고도 한다. 삼국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상에 남아있는 제작기록은 1433(세종 15)가 처음이다. 선기옥형(璇璣玉衡)·혼의(渾儀)·혼의기(渾儀器)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의 우주관이던 혼천설에 기초를 두어 BC 2세기경 중국에서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확실한 자료가 없어 추론에 불과하나, 삼국 시대 후기에서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 만들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으로는 1433년(세종 15) 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이 고전을 조사하고 이천(李蕆)·장영실(蔣英實) 등이 그 제작을 감독하였다. 이로부터 천문학의 기본적인 기구로서 조선시대 천문역법(天文曆.. 2024. 2. 25.
혼상 하늘의 별들을 보이는 위치 그대로 둥근 구면에 표시한 천문기기. 별이 뜨고 지는것,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측정할 수 있다. 하루에 한번씩 회전시켜서 보면 별이 뜨고 지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도 측정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BC 70~BC 50년에 제작하기 시작했고, 이후 왕조가 바뀔 때마다 개량했다. 한국에서는 1437년(세종 19)에 제작한 것이 기록으로는 최초이다. 이것은 지름 71.6cm인 구(毬)에 칠포를 입혀서 만들었다. 이후 세조 때 만든 것은 오랫동안 잘 사용되었으나 기계부분에 고장이 생겨 1526년 수리 후 내관상감(內觀象監)에 보관되면서 두번째 혼상이 제작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타 버렸다. 세번째는 1601년(선조 34)에 이항복(李恒福)의 감독하에 .. 2024. 2. 25.
현주일구 조선시대에 만든 휴대용 해시계로 1437년 세종 19년 4월에 정초·장영실·김빈·이천·김돈 등이 만들었다. 3각형의 시표는 중세 아라비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해시계 제작에 대한 최초의 공식기록인 《세종실록》에 의하면, 현주일구는 1437년(세종 19) 4월에 정초(鄭招)·장영실(蔣英實)·김빈(金鑌)·이천(李蕆)·김돈(金墩)등이 만든 것으로, 중국 원대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천문의기(天文儀器)의 영향과 전통을 이은 것이다. 시표(時標)와 시반(時盤)이 수직이 되도록 기둥에 추를 매달아 십자(十字)의 중심에 걸리게 하고, 남북을 정하기 위하여 자침(磁針)을 두었으며, 시표는 세선(細線)이 3각형을 이루어 접을 수 있게 하였다. 3각형의 시표는 중세 아라비아의 영향으로 보인다. 2024. 2. 25.
천상열차분야지도 ‘비석’하면 우리는 만주벌판에 서있는 ‘광개토대왕비’를 떠 올리지만,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비석이 서울 한복판 국립고궁박물관 과학실에도 우뚝 서 있다. 조선조 태조 4년(1395)에 고구려 시대 평양에서 각석한 천문도(‘평양 성도(星圖)’) 비석의 탁본을 바탕으로 돌에 새긴 천문도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가 바로 그것이다(태조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천(全天) 천문도 가운데 하나로써 우리 역사의 대표적인 유산이며, 세계적인 보물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란 하늘의 모습 ‘천상’을 ‘차’와 ‘분야’에 따라 벌려놓은 ‘그림’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차’란 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설정한 적도대의 열두 구역을 말하고, ‘분야’란 하늘의 별자리 구역을 열둘로 .. 2024. 2. 25.
정남일구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해시계로 1437년 세종 19년 4월에 정초 ·장영실 ·김빈 ·이천 ·김돈 등에 의하여 완성된 일련의 천문의기, 곧 앙부일구 ·천평일구 ·현주일구 ·규표 중의 하나이다. 해시계의 제작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세종실록》에 처음으로 나타나 있다. 1437년(세종 19) 4월 정초(鄭招)·장영실(蔣英實)·김빈(金鑌)·이천(李蕆)·김돈(金墩) 등에 의하여 완성된 일련의 천문의기(天文儀器), 곧 앙부일구(仰釜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현주일구(縣珠日晷)·규표(圭表) 중의 하나로 이들 해시계들은 중국 원(元)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천문의기의 영향과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매우 정밀한 것으로 현주일구·천평일구의 특징과 간구(簡晷)의 특징을 함께 지닌 우수한 해시계였다. 부(趺).. 2024. 2. 25.
자격루 시계가 없었던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시간을 알았을까? 아마도 낮에는 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시간을 추측했을 것이고, 밤에는 달이나 별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시간을 가늠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어떻게 시간을 알았을까? 해와 별의 움직임을 이용해서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은 날씨에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날씨가 흐리거나 여름같은 장마철의 경우에는 해와 별이나 달 등을 이용해서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을 사용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물이 계속 흐르면서 밤이나 낮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시간을 항상 알려줄 수 있는 물시계와 같은 국가 표준 시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세종대왕 시대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수압을 조절하는 3단의 수위 조절용 항아.. 2024. 2. 25.
일성정시의 낮과 밤의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만든 천문시계. 1437년(세종19)에 처음 제작된 것으로 자격루의 시각교정에 사용되었다. 일성정시의는 해와 별들이 북극을 중심으로 일정하게 회전한다는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그 구성부품은 주천도분환, 일구백각환, 성구백각환, 계형, 정극환, 용주, 부(받침대) 등으로 구성된다. 현재 복원한 일성정시의가 여주 영릉(1999), 대전 한국천문연구원(2002) 등에 전시되어 있다. 2024.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