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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사291

일구대 세종 때에 만들어진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올려놓는 받침대이다. 세종 대왕은 서울의 혜정교와 종묘 앞에 일구대를 만들고 앙부일구를 설치했다. 이것은 현재 경복궁 교태전 아미산에 있는 “앙구일구대”를 본떠 1988년 11월 만들었다. 2024. 2. 25.
앙부일구 조선 세종 때에 다양한 해시계가 제작되었는데, 그 중 가장 아름답고 독특한 해시계가 솥 모양의 앙부일구이다. 이 앙부일구는 궁궐과 관청에 설치되어 시각을 살펴볼 수 있게 했다. 1434년(세종 16)의 세종실록에는 ‘처음 앙부일구를 만들어 종묘 남쪽 거리와 혜정교 옆에 설치하였다’고 하여, 당시 제작된 천문의기 중 앙부일구만이 서민들을 위한 공중용 해시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1592~1598년), 병자호란(1636~1637년), 그리고 일제강점기(1910~1945년)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천문의기들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세종 때 제작된 앙부일구 역시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영릉,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기상청 등에 17세기 이후의 앙부일구 8기가 보존되어 있다. 2024. 2. 25.
소간의 소간의는 사용하기 편하도록 간소하게 만든 간의이다. 조선에서는 1434년(세종16)에 간의를 제작하였는데, 이를 더욱 간소화시켜서 적도좌표와 지평좌표를 변환하고 이동이 편리하도록 크기를 축소한 소간의를 제작했다. 소간의는 행성과 별들의 좌표와 시간, 고도와 방위를 측정하도록 만들어졌다. 소간의의 구성부품은 사유환과 규형, 적도환과 백각환, 용주, 부(받침대)로 구성된다. 지금까지 복원된 소간의가 여주 영릉(2000), 대전 한국천문연구원(2009) 등에 전시되고 있다. 2024. 2. 25.
간의 조선시대 천문대에 설치되었던 중요한 천문관측기기들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의 각도기(角度器)와 비슷한 구조를 지녔다.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와 함께 조선의 천문대에 설치한 가장 중요한 관측기기이다. 오늘날의 각도기(角度器)와 비슷한 구조를 가졌으며, 혼천의를 간소화한 것이다. 1437년(세종 19)에 완성된 간의제도는 《원사(元史)》에 나타난 ‘곽수경법(郭守敬法)’에 따라 대간의와 소간의를 만들었다. 소간의는 대간의를 휴대용으로 축소해 정동(精銅)으로 다리[趺]를 만들고, 그 둘레에 수거(水渠: 일종의 도랑)를 파서 자오(子午)에 준하여 수평을 정할 수 있도록 했다. 적도환(赤道環)은 주천(周天: 공전)을 365도 1/4로 나누어 동서로 운전하면서 칠정(七政: 일 ·월과 수 ·화 ·금 ·목 ·토의 5행성).. 2024. 2. 25.
세종대왕 어보 어보(御寶)는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예물로 일반적으로 왕·왕비·왕세자 등 왕실의 의례용 도장을 통칭한다. 어보는 존호나 시호를 올릴 때나 가례, 길례 등 각종 궁중 의식에서 사용되었다. 어보는 조선 태조의 4대조부터 대한제국 순종을 비롯하여 추존왕 등 34명의 왕과 48명의 왕비와 계비, 세자와 세자빈을 위해 제작되었다. 현존하는 어보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어보는 1441년에 제작된 문종비 현덕왕후의 어보이며, 가장 늦은 시기의 어보는 1928년에 제작된 순종비 순명효황후의 어보이다. 어보에는 왕과 왕비의 덕을 기리는 존호(尊號)와 돌아가신 후 공덕을 칭송하는 시호(諡號) 등을 새겼다. 추가로 존호나 시호를 올릴 때마다 어보를 새로 제작하였다. 존호를 올리는 의식 등에 사용하고 나중에 종묘 신주실에.. 2024. 2. 25.
세종 영릉 비각 비각은 능 주인의 자취를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우고 비바람 따위를 막기 위하여 그 위를 덮어 지은 집이다. 영릉 비각 안에 있는 영릉 표석은 영조 21년(1745년)에 세운 것으로 표석 앞면의 글은 조상경이 썼고 뒷면의 글은 이학이 썼다. 영릉 비문 내용은 세종 장헌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은 홍무 30년(정축년 1397년) 4월 10일에 탄생하여 영락 16년(무술년 1418년)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경태 원년(경오년 1450년) 2월 17일에 승하하여 6월 광주 현릉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성화 5년(기축년 1469년) 3월 6일에 여주 서북성산 자좌(북)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재위는 32년 나이는 54세이다. 명나라에서 장헌의 시호를 내렸다. 왕비 선인제성 소헌황후 심씨는 홍무 28년 (을해년 139.. 2024. 2. 24.
기하 2024. 2. 20.
충주 문주리 석조 여래 좌상 및 5층 석탑 충주 문주리 석조 여래 좌상은 충주시 대소원면의 탑동마을에 있는 석불 좌상이다.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마을 가운데에 있으며 주민들이 흙벽돌로 보호각을 만들어 봉안하고 관리도 하고 있다. 충주 문주리 석조 여래 좌상은 편단우견의 항마촉지인 불상으로, 팔각 연화대좌와 광배가 함께 전한다. 그러나 석불과 광배는 대좌의 석질이 다르고, 조각 솜씨도 달라서 석불과 광배는 후대에 다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이며 육계는 표현되지 않았다. 이마에는 백호공이 있으며, 얼굴에 비해 코는 크고 입은 작으며 눈은 반개한 모습이다. 양쪽 귀는 짧고 어깨는 약간 위로 올라간 모습이며 목에는 삼도의 흔적이 보인다. 법의는 편단우견인데 옷 주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게 처리하였으며 등 뒤에까지 옷 .. 2024. 2. 12.
백운암 철조여래좌상(보물 제1527호)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은 백운암에서 주존불로 봉안하고 있는데, 원래 이곳에서 전하던 불상은 아니다. 인근에 고려시대 대규모 절터인 억정사지(億政寺址)가 있어서 그곳에서 옮겨온 불상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백운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창건 연기가 전하고 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는 충주 지방으로 피신을 왔고, 이때 무당이 곧 환궁할 것을 예언하였다. 예언대로 명성황후가 환궁을 하자 이 무당에게 진령군이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어느 날 진령군의 꿈에 백의철불이 나타나 현재 백운암이 있는 곳에 안치해달라고 하였으므로, 1886년 그 자리에 백운암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은 편단우견의 항마촉지인 여래좌상으로 규모는 87㎝ 정도로 크지 않은 상이다. 얼굴은.. 2024. 2. 2.
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Chungju Goguryeo Monument) 또는 중원 고구려비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 5세기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의 높이는 2.03 m, 폭은 55 cm, 두께는 33 cm이고,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소재한다. 1981년 3월 18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에는 충주시 차원에서 국원 고구려비(國原 高句麗碑)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Site)에 등재를 구상하였다. 2019년 충주 고구려비가 장수왕시기에 건립된 것이 아니라 광개토태왕이 건립했다는 가설이 나왔다. 새로 판독한 문자에 의하면 '영락7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고 써있었으며 영락(.. 2024. 2. 1.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1401호)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산 중턱의 바위 2곳에 모두 9구의 불상을 조각한 마애불이다. 큰 절벽의 한 면에 있는 1구의 불상은 매우 도드라게 새겼는데, 앉아 있는 자세의 무릎이 넓고 높아 특이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무릎에 비해 상체는 짧고 얼굴은 둥글지만 네모난 모습에 가까워 초기 마애불의 기법으로 생각된다. 머리 주위에는 연꽃 속에서 작은 부처들이 피어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이런 모습은 봉화 북지리마애불상과 유사하지만 좀 더 경직된 인상이다. 다른 바위 면에는 약간 떨어져 무리를 짓고 있는 불상들이 새겨져 있다. 따로 있는 불상의 왼쪽에는 무릎 부분이 깨진 채 앉아 있는 불상이 있고, 왼쪽에는 왼쪽 다리를 세우고 오른쪽 다리를 꿇어 앉으며 무언가를 바치는 공양상이 있다. 힘있는 얼굴, 강건한 체.. 2024. 1. 28.
소마스칸다(인도11세기) 2024. 1. 14.
시바와 파르바티(인도9세기) 2024. 1. 14.
아이들을 수호하는 모신(인도6세기) 2024. 1. 14.
파르바티(인도13세기) 2024. 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