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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항아리(조선시대) 2024. 3. 2.
백자 칠보무늬 항아리(조선시대) 백자 칠보무늬 항아리는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을 담아 두거나 담그는 독이다 2024. 3. 2.
백자 청화 복숭아 모양 연적(조선시대)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문자를 쓰거나 채연에 물감을 풀어 그림을 그릴 때 벼루에 적당한 양의 물을 떨어뜨려주어야 하는데, 그 목적을 위하여 고안된 그릇이다. 연적에는 구멍 둘을 내어 공기를 조절함으로써 연적 안에 물을 넣고 또 원하는 만큼의 물이 나오도록 조절할 수 있게 하였다. 삼국시대 이래 벼루를 써왔으므로 벼루에 물을 주기 위한 연적도 함께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시대의 것으로는 희귀하게도 고구려의 도제(陶製) 거북연적이 발견되고 있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지식인 사이에 문방취미가 보급되면서 아름다운 청자연적이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글을 숭상하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연적 역시 그 형태가 다종다양하여지고 수효도 많아진다. 조선시대 연적은 조선 전반기에 분청으로 .. 2024. 3. 2.
백자 복숭아 모양 연적(조선시대)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문자를 쓰거나 채연에 물감을 풀어 그림을 그릴 때 벼루에 적당한 양의 물을 떨어뜨려주어야 하는데, 그 목적을 위하여 고안된 그릇이다. 연적에는 구멍 둘을 내어 공기를 조절함으로써 연적 안에 물을 넣고 또 원하는 만큼의 물이 나오도록 조절할 수 있게 하였다. 삼국시대 이래 벼루를 써왔으므로 벼루에 물을 주기 위한 연적도 함께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시대의 것으로는 희귀하게도 고구려의 도제(陶製) 거북연적이 발견되고 있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지식인 사이에 문방취미가 보급되면서 아름다운 청자연적이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글을 숭상하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연적 역시 그 형태가 다종다양하여지고 수효도 많아진다. 조선시대 연적은 조선 전반기에 분청으로 .. 2024. 3. 2.
3.1운동 소요 일람 지도 조선총독부에서 1919년 4월 20일까지 전국의 3.1운동 상황을 정리한 지도이다. 붉은색 점은 3.1운동이 일어났거나 계획되었지만 저지된 곳이다. 2024. 3. 1.
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44호 조선총독부 고등경찰과에서 작성한 보고서이다. 4월 7일 북내면 현암리 등지에서 주민들이 일제의 체포반에 저항하였으며 발포로 인해 3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체포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24. 3. 1.
유관순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유윤기(柳閏基)와 숙부 유중무(柳重武)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고,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사회개혁, 부녀자 계몽, 교육사업 등을 통해 자주독립의 길을 찾고자 흥호학교(興湖學校) 운영에 가담하여 인재 배출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이며, 자녀 교육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큰 아들 유우석(柳愚錫)은 공주 영명학교에서, 둘째 딸인 유관순은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유관순의 고향은 철도가 부설되기 전 .. 2024. 2. 29.
유관순 생가 유관순 열사 유적인 생가지는 1972년 10월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터만 남아 있었던 곳을 1991년 12월 초가집 본체와 부속사로 복원하였다. 생가 옆에는 박화성이 시를 짓고, 이철경이 글씨를 쓴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유관순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위치해 있다. 인근에는 유관순열사 기념관이 열사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3년 4월 개관하였다. 2024. 2. 29.
3.1 만세운동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 또는 대한 독립 만세 운동(大韓獨立萬歲運動)은 일제강점기에 있던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 병합 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줄여서 기미운동(己未運動)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최근, 본 운동의 규모와 영향력을 고려해 3.1 혁명(三一革命)이라고 부르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 대표 33인으로 부르며, 이외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 2024. 2. 29.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은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 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를 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을 복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겨레의 전당이다. 국민운동으로 추진되어 1987년 8월 15일에 개관하였으며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에 위치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을 세우자는 논의는 1945년 광복 직후부터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1946년 천도교회관에서 사회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기념관 건설준비위원회가 결성된 것과, 1975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주최 ‘광복30주년기념심포지엄’에서 정식 안건으로 토의, 합의하여 정부에 건의한 바도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82년 일본의 교과서에 실린 식민지 서술 부.. 2024. 2. 29.
여주 매룡리 고분 청자 연꽃모양 잔 여주 매룡리 고분군(驪州 梅龍里 古墳群)은 경기도 여주시 매룡동에 있는 고분군이다. 2002년 9월 16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여주를 대표하는 삼국시대 고분군일 뿐만 아니라, 경기지역에서도 가장 대규모이다. 더 나아가 한강유역의 신라 고분군 중에서 이 고분군은 충주의 《누암리 고분군》과 함께 신라의 한강유역진출과 그에 따른 점령지역 통치방식을 연구하는 고고학적 실마리를 제공한다. 유적은 여주군청 동남쪽 1,400m~2,000m 사이의 연주-연양 간 도로를 기준으로 남쪽으로 1,500m 정도까지 이르는 지역에 형성된 얕은 구릉상에 위치한다. 고분군의 북쪽으로는 남한강 본류가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고, 정남쪽으로는 해발 175.3m의 황학산이 자리한다. 고분은 이 황학산의 북쪽 가지능선.. 2024. 2. 29.
여주 고달사지 여주 고달사지(驪州 高達寺址)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달사 터이다. 1993년 7월 23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82호로 지정되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세워진 후, 고려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절로 성장하였다.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절터 안에는 깔끔한 모양과 세련된 조각수법의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를 비롯하여 훌륭한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 2024. 2. 29.
여주 원향사지 청동유물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원부리(元富里)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이전까지 ‘원부리사지(元富里 寺址)’로 알려져 있었다. 1992년 중부내륙 고속도로의 건설 당시 지표조사를 위해 충북대학교 선사문화연구소가 처음 조사했고 1999년~2001년에 기전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944년에 건립된 영월(寧越) 흥령사 징효대사보인탑비(興寧寺澄曉大師寶印塔碑)에 따르면 원향사는 진성여왕 시기인 888년에 선종사원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절터에서는 건물지 18동과 기와·토기·청자·금속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건물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1호 건물지와 17호 건물지에서 통일신라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화문 토기(印花紋土器)와 승문선조문(繩紋線條紋蓋瓦) 기와가 출토되었고 3~4차례 증·개축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로 미.. 2024. 2. 29.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 1995년 8월 7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남한강 부근 해발고도 123m의 구릉 경사지에 형성된 선사 주거지로, 한국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1962년에 토기와 석기 등이 발견되었고, 서울대학교박물관과 고고학과에서 1972~1979년에 발굴하여 모두 16기의 집터를 확인하였다. 이들 중 3기는 구릉 동쪽 경사면에서, 나머지 11기는 서쪽 사면(한강 쪽)에서 발견되었다. 집터 크기는 작은 것은 5m×2.5m, 큰 것은 10m×4.2m 정도이다. 1977년에 발굴된 12호 집터는 맞배지붕을 하고, 39개의 기둥구멍이 3열로 배치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진흙을 다진 흔적이 있고, 화덕자리 3개와 저장구덩[貯藏冗] 7개가 있었다. 주거바닥에서 발견된 유물은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 ·민무늬토기 ·.. 2024. 2. 28.
여주 연양리 구석기유적 아파트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터파기 공사가 진행되던 중 세종대학교 박물관이 발견하였다. 이후 기전문화재 연구원이 2004년 5월부터 8월까지 시굴조사를 하고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약 1만 1551㎡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 크게 2개의 지점(약 2,575㎡)에서 구석기시대 석기들이 집중적으로 묻혀 있음이 나타났고 이를 토대로 2004년 9월부터 2005년 4월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이후 하부토양쐐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적갈색 점토층의 상부에서 1,782점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하부 토양쐐기가 약 6만 5000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미루어 유적은 그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석기의 종류는 몸돌, 격지, 부스러기, 모룻돌, 자갈돌, 찍개를 포함한 연모 등인데, 대부분이 석기 제작과 관련되어 있고 몇.. 2024. 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