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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2198

청룡사지 보각국사탑(국보 제197호) 청계산 중턱의 청룡사에 자리한 탑으로,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았다. 보각국사(1320∼1392)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높은 명성을 떨쳤다. 특히 계율을 굳게 지키고 도를 지킴에 조심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73세의 나이로 목숨을 다하자, 왕은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정혜원륭’이라 내리어 탑을 세우도록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조성되었는데, 바닥돌 위에 아래·가운데·윗받침돌을 얹어 기단(基壇)을 마련하고 그 위로 탑몸돌과 지붕돌을 올려 탑신(塔身)을 완성하였다. 기단은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8각으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윗받침돌에는 솟은 .. 2024. 1. 29.
청룡사지 석종형승탑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승탑(忠州 靑龍寺址 石鍾形僧塔)은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승탑이다. 2006년 3월 3일 충청북도의 문화재자료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정사각형의 지대석위에 각형 괴임대가 새겨진 하댓거를 놓고 호감암의 석종형탑신을 올렸다. 탑신 윗부분은 복발모양으로 조각하여 정상부에 3단의 돌출부분을 조식하였고 탑신부 가운데에 부도의 주인공을 새겨놓았는데 '寂雲堂舍利塔'으로 보여진다 2024. 1. 29.
청룡사 위전비 2004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청룡사의 창건 및 경영 등과 관련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을 적은 위전비이다. ‘위전(位田)’이란 사찰이나 관청, 학교 등의 경영에 필요한 토지를 말한다. 현재 머리 부분의 옥개석이 일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청룡사는 고려시대에 한 도승(道僧)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창건설화에 의하면, 도승이 이 근처를 지나다가 공중에서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희롱하는 것을 보고 주변 산세를 살피니 풍수지리설상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길지였으므로,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절을 짓고 청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1392년(태조 1) 보각국사(普覺國師) 혼수(混修)가 이 절에서 입적하자 태조가 절을 중창하도록 명하였다... 2024. 1. 28.
저녁노을 노을 또는 놀은, 새벽이나 아침 또는 저녁에 태양 광선이 대기를 통과하는 거리가 길어져서 태양 광선 중 파장이 짧은 파란색은 대기 중에서 산란되고, 파장이 긴 빨간색은 산란되지 않아 하늘이 빨간색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생성 햇빛 중 가시광선은 여러 가지 색의 빛으로 되어 있지만, 모든 색의 빛이 거의 균일한 세기로 동시에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되면 백색광으로 보인다. 이 백색광 중에서 비교적 파장이 짧은 남색과 푸른색이, 파장이 긴 오렌지색과 붉은색보다 기체 분자로 인해 산란이 더 잘 된다. 그래서 하늘이 파랗게 보인다. 그러나 태양이 지평선 부근에 있을 때에는 햇빛이 대기권을 통과하는 경로가 길기 때문에 산란이 잘 되는 푸른색의 빛은 도중에서 없어지고 붉은색의 빛만 남는다. 이 빛이 하층의 구름입자 때문.. 2024. 1. 27.
석종사 석종사는 충주시의 외곽의 금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웅전과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오화각 및 범종각, 소소원(선방), 안양원, 금봉암, 조종육엽(조실채), 금봉선원, 감로각, 천척루(누각), 회명당(후원), 원흥료(종무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출가한 승려만을 위한 공간을 지양하고, 재가자 역시 사찰에 몸담아 수행할 수 있도록 공간을 조성하고 있다. 또한 템플스테이를 통해 일반인들도 조용히 수양하고 참선하며 불교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불교대학을 운영함으로써 불자와 일반인들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 이 밖에도 불설사십이장경, 인천안목 권상과 같은 여러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2024. 1. 26.
창룡사 남산 중턱 기슭에 위치한 창룡사는 신라 문무왕[661~681]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전해진다. 조선시대까지 두 차례에 걸쳐 중건되었다고 하며, 1988년에 전통 사찰로 지정되었다. 창룡사는 충주 창룡사 다층 청석탑(靑石塔) 등의 유물로 보아 창건 시기가 신라시대로 올라가는 절임을 알 수 있다. 20세기 초반에 작성된 「중수기」에 의하면 고려 후기에는 나옹화상이, 조선 선조 때에는 서산대사가 중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870년(고종 7)에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창룡사 법당을 헐어 수비청(守備廳)을 지음으로써 옛 자취가 사라졌다. 2024. 1. 25.
수옥정 폭포 괴산군의 연풍면 원풍리에 있는 폭포이다. 동쪽으로 문경새재 도립공원이 위치한다. 조령삼관문에서 소조령으로 흘러내리는 계류가 절벽을 통과하면서 형성된 높이 약 20m의 폭포이다. 폭포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류의 두 곳은 깊은 소(沼)를 이루고 있다. 고려 시대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이곳에 피신했었다고 전한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울창한 숲이 천연의 요새를 이루었다. 『여지도서』(연풍)에 "수옥폭은 관아의 동쪽 15리에 위치한다."고 하였으며, 동일문헌에 "수옥정이 이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적고 있다. 수옥정은 1711년(숙종 37) 연풍현감으로 있던 조유수(趙裕壽, 1663-1741)가 청렴했던 자신의 삼촌 조상우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라고 전한다. 이 수옥정은 『연풍군읍지』(1.. 2024. 1. 24.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보물97호)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감실 크기 3.63m×3.63m, 화강석제. 높이 12m나 되는 큰 암석에 감실을 마련하고 불상 2구를 병좌(竝坐)시켰다. 두 불상은 마멸이 심하나 비슷한 수법으로 조성되었다. 얼굴은 둥글고 평판적(平板的)이며 여기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 등을 묘사하여 치졸하나마 미소가 번지고 있고, 코와 왼쪽 뺨이 패었으나 제 모습이 대체로 남아 있다. 어깨가 반듯하고 가슴이 편평하여 몸통은 전체적으로 굴곡이 없이 처리하여 형식화되어 있다. 법의는 한쪽 어깨에만 걸쳤으며, 도식적인 옷무늬가 무딘 조각 수법으로 묘사되었다. 광배에는 세부 수법을 완전히 알 수 없으나 화불(化佛)이 조각되었으며,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의 수법과 비슷하다. 이와 같이 나란히 .. 2024. 1. 24.
교귀정 교귀정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 구 경상감사가 엄무를 인계인수 하던 교인처(交印處)로 1470년경(성종 초)에 건립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3월(건양 1년) 의병전쟁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폐허로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건물의 양식은 팔각지붕에 이익공, 정면3칸 측면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교귀정(交龜亭) 소나무는 경상감사 교인식이 이루어진 교귀정의 역사와 함께한 나무로 전해 지고 있다. 특히 나무의 뿌리가 교귀정 방향인 북쪽으로 뻗어 있고 줄기는 길손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남쪽으로 향해 있으며, 마치 여인이 춤을 추는 듯하여 새재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2024. 1. 24.
초가삼간 가장 최소한의 크기를 가진 가옥을 나타내는 용어. 대략 3평정도 되며 사람이 간신히 발뻗고 잘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매우 가난하고 초라한 집을 의미한다. 실재로도 초가삼간이란 말은 가난함을 대변하는 용도로서 자주 쓰여졌으며 과거에 비해 그 활용도는 떨어지나 요즘에도 간간히 쓰여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초가삼간의 정 반대를 가리키는 말로는 "99칸 기와집"이라는 것이 있다. 초가삼간이 가난함을 나타낸다면, 99칸은 부유함과 넉넉함을 나타내는 말로서 쓰여졌었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는 "고래등 같은 집"이 있으며 때론 이 두 용어를 합쳐서 쓰기도 한다. 2024. 1. 23.
감나무 2024. 1. 23.
장독 2024. 1. 23.
눈 내린 시골 2024. 1. 22.
정원이 있는 한옥 2024. 1. 22.
옛 정취 2024. 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