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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7

여주 흔암리 선사유적 1995년 8월 7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남한강 부근 해발고도 123m의 구릉 경사지에 형성된 선사 주거지로, 한국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1962년에 토기와 석기 등이 발견되었고, 서울대학교박물관과 고고학과에서 1972~1979년에 발굴하여 모두 16기의 집터를 확인하였다. 이들 중 3기는 구릉 동쪽 경사면에서, 나머지 11기는 서쪽 사면(한강 쪽)에서 발견되었다. 집터 크기는 작은 것은 5m×2.5m, 큰 것은 10m×4.2m 정도이다. 1977년에 발굴된 12호 집터는 맞배지붕을 하고, 39개의 기둥구멍이 3열로 배치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진흙을 다진 흔적이 있고, 화덕자리 3개와 저장구덩[貯藏冗] 7개가 있었다. 주거바닥에서 발견된 유물은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 ·민무늬토기 ·.. 2024. 2. 28.
신륵사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2016. 7. 21.
세종대왕릉 사진을 클릭하시면 큰 화면으로 선명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16. 7. 17.
여주 열대원산 과일의 하나로, 수세미와 비슷한 박과 식물. 과일로 분류되는 것은 수박, 멜론 등의 박과 식물들이 주로 과일로 인정받는 과일채소로 분류되기 때문인데, 맛으로 보나 용례로 보나 실질적으로는 오이, 박과 같은 채소로 사용된다. 2015. 8. 31.
강천보 여주시 일대 농업용수와 상수도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한 보(洑)이며 총사업비 2,699억이 투입되었다. 이명박정부에서 추진한 4대강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11월에 착공하여 2011년 10월 15일 일반에 공개되었다. 보의 길이는 440m이며 높이는 8m이다. 7개의 수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가동보 구간의 길이는 350m, 수문이 없는 고정보 구간은 90m이다. 보의 좌안에는 소수력발전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발전용량은 4,995kw이다. 또한 인근에 한강통합운영센터가 있어 남한강의 3개보(강천보, 여주보, 이포보)를 이곳에서 관리한다. 강천보의 좌측 광장에는 한강문화관이 있어 한강의 수로와 문화를 소개하고 있으며, 39m 높이의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2015. 7. 12.
세종대왕릉(영릉)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 2015. 7. 11.
신륵사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의 남한강변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절 이름인 '신륵(神勒)'에서 륵(勒)은 굴레를 뜻한다. 고려 우왕 때 인근의 마암(馬巖)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행패를 부리자 미륵불 또는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이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신륵사란 절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아마도 지세가 약한 곳에 절을 세워 불력(佛力)으로 남한강의 범람을 막아보고자 했던 바람에서 유래한 설화로 추측된다. 1376년, 고려말의 고승 나옹은 회암사의 주지로 중창불사를 했다가 탄핵을 받아 유배를 떠났는데, 유배길에 신륵사에 들렀다가 그대로 입적하였다. 나옹의 제자들은 스승을 그대.. 2015. 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