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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11

조곡관(영남 제2관문) 조선초기에는 관료들과 양반들만이 넘나들 수 있던 길이어서 신분이 낮은 서민들은 꼭 한 번 걸어 보고 싶은 동경의 길이기도 하였습니다. 훗날엔 양반세력 뿐만 아니라 보부상을 비롯한 서민들 역시 이 길을 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이곳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왜군을 막지 않고 충주 탄금대로 후퇴하여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던 안타깝고 아쉬움이 묻어 있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근세에 들어와서 천주교 박해로 수많은 신도들의 한이 맺힌 길이기도 합니다. 총 길이 10km인 문경새재는 외침에 대비하여 세 개의 관문을 두었습니다. 세 관문 중 제 2관문인 조곡관을 시작으로 1관문과 3관문이 세워졌습니다. 2관문인 조곡관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 .. 2024. 1. 24.
교귀정 교귀정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 구 경상감사가 엄무를 인계인수 하던 교인처(交印處)로 1470년경(성종 초)에 건립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3월(건양 1년) 의병전쟁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폐허로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 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건물의 양식은 팔각지붕에 이익공, 정면3칸 측면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교귀정(交龜亭) 소나무는 경상감사 교인식이 이루어진 교귀정의 역사와 함께한 나무로 전해 지고 있다. 특히 나무의 뿌리가 교귀정 방향인 북쪽으로 뻗어 있고 줄기는 길손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남쪽으로 향해 있으며, 마치 여인이 춤을 추는 듯하여 새재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2024. 1. 24.
정원이 있는 한옥 2024. 1. 22.
기와집 기와집은 기와로 지붕을 만든 집이다. 보통 찰흙으로 만든 검은색 기와를 많이 썼으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거주하는 집은 푸른 유약을 발라 만든 청(푸른색)기와로 지붕을 이기도 하였다. 기와는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이 기와집을 짓고 살거나 사기에는 상당히 어려웠다. 기와집은 신분에 따라 색(푸른색,검은색등)과 종류(청기와등)가 달랐다.기와집은 조선시대의 유교의 영향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생활하는 공간이 철저히 구분되어있다. 남자는 사랑채에서, 여자는 안채로 구분되어있다. 2024. 1. 21.
주흘관(영남 제1관문) 문경새재 제1관문인 주흘관은 한말 항일의병 때 일본군이 불 태웠던 문루를 1922년에 다시 복원하고 1966년에 보수를 하였습니다.그 후 1973년에 폭과 높이를 각각 1m 증축하고 총구를 만들어 원형이 변형되었습니다. 주흘관의 누각은 정문 3간,측면2간, 협문2개가 있는 팔각 지붕이며 통행에 필요한 홍예문의 높이는 3.6m, 폭 3.4m, 길이 5.4m 이며, 여기에 설치된 대문의 높이는 3.6m,폭 3.56m, 문의 두께는 11cm 입니다. 부속 성벽의 폭과 높이는 각각 2 ~ 3m이고, 개울물을 흘려 보내는 수구문을 갖추고 있으며 길이는 동쪽이 500m, 서쪽이 400여m입니다. 문경새재 1관문부터 잘 닦인 도로를 따라 2관문을 거쳐 3관문을 넘는 고갯길은 옛 길의 향수를 달래며 과거 선조들의 발자.. 2024. 1. 21.
문경새재 드라마 세트장 2019. 2. 10.
문경새재 제1관문(주흘관) 2019. 2. 10.
문경새재 3관문 2018. 5. 16.
문경새재 제3관문(조령관) 백두대간의 조령산 고개를 넘는 새재는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서울을 연결하는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이다. 새재라는 지명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새로 된 고개,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새재는 산새가 높고 험준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문경새재에는 1 관문인 주흘관, 2 관문인 조곡관, 3 관문인 조령관 총 3개의 관문이 있다. 그중 3 관문은 새재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선조 때 공사를 시작하여 숙종 때 중창한 3 관문은 고려 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문루는 1907년 훼손되어 불에 탔고, 홍예문과 누각, 좌우의 석성 135m는 1976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2015. 11. 5.
문경새재 제3관문(조령관) 백두대간의 조령산 고개를 넘는 새재는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서울을 연결하는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이다. 새재라는 지명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새로 된 고개,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새재는 산새가 높고 험준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문경새재에는 1 관문인 주흘관, 2 관문인 조곡관, 3 관문인 조령관 총 3개의 관문이 있다. 그중 3 관문은 새재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선조 때 공사를 시작하여 숙종 때 중창한 3 관문은 고려 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문루는 1907년 훼손되어 불에 탔고, 홍예문과 누각, 좌우의 석성 135m는 1976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2015. 11. 5.
문경새재 파노라마 2014.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