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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

이탈리아 포로 로마노

by KimPaulus 2019. 6. 7.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인들이 시민생활의 중심지로 생각하던 신전과 공회당 등 공공 기구와 함께 일상에 필요한 시설이 있는 곳이다. 팔라티노 언덕 주변에는 한때 원주민들이 수장 묘지로 사용하던 늪이 있었다. 기원전 6세기에 에트루리아의 왕 타르퀴노 프리스코가 하수처리장을 시설하고 이 늪을 메워버리자 공회장터 역시 매몰되었는데,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가축 방목지로 사용되었기에 '우시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발굴작업이 괄목할 정도로 진행된 다음 이 공회장은 엄청난 신전과 공공건물, 그리고 아치형 건물과 상점이 나란히 이어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건물들을 치장하고 있는 조각상들도 무수히 널려 있으나 안타까운 것은 이 석상들 중 온전한 게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놓여 있는 곳곳에 새겨진 역사의 의미는 대단하다. 또한 전체적으로는 인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이곳의 건물들은 모두 동시대에 함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하나 상세하게 파악하는 것은 힘든 작업이 될 수 있다.

 

포로 로마노는 캄피돌리오의 원로원 청사 뒷면의 벼랑에서 바라보면 더 멋진 풍경으로 나타난다. 그 벼랑은 타르페아(Tarpea)라는 어느 소녀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타르페아는 조국을 배반하고 사비니에게 성채를 넘겨주었는데, 훗날 그에 대한 죗값으로 벼랑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 뒤로 타르페아 벼랑은 배반자들의 처형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또 포로에는 중요한 신전 터 세 개가 있다. 첫째로 368년에 보수작업이 끝난 열두 신들을 모시던 포르티쿠스 데오룸 콘센시움은 이교 문화의 마지막 반작용을 증명해주고 있다. 둘째로는 베스파시아노 신전으로 티투스 황제 때 착공하여 도미치아누스 황제 때인 89년에 완공된 코린토 양식의 원주이다. 셋째로는 기원전 367년에 건설되었던 화해의 신전이 있던 바닥이 남아 있다. 이 신전은 평민도 호민관이 될 수 있도록 한 피치니오 세스토 스톨로네 법안이 도입된 것을 기념해 세워졌으며, 이 법안의 도입으로 로마의 정치가 원로원과 민중이 참여하는 체제(S.P.Q.R)로 바뀌었다. 민중의 정치적 승리라는 쾌거가 이루어진 것이다.

벼랑에서 내려다보면 원주 여덟 개가 높이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나라의 보물을 보관하던 사투르누스 신전의 잔해이다. 기원전 497년에 세워졌는데, 도리아풍의 원주는 4세기 때의 것이라 한다. 사투르누스 신전 처마 밑으로 화산의 재단인 풀카날레라는 제철용 도가니가 있었는데, 사비나의 약탈 이후 사비나의 왕 티투스 타치오와 맺은 동맹을 기념하여 로물루스에게 헌정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공회당과 세베리우스의 개선문 사이의 공터엔 정치집회를 하던 코미시움이 있었다. 여기엔 아직도 시민들에게 열변을 토하던 정치인들의 연단이 있다. 'Lapis Niger'라는 이 연단은 로물루스의 묘지 덮개였다 한다. 세베리우스의 개선문은 그의 아들들 제타와 카라칼라에 의해 203년에 헌정되었다. 두 형제는 우의가 두터웠으나 나중에는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카라칼라가 승리하여 헌정판에서 제타의 아름을 지워버렸으니, 권력이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속성을 가졌나보다.

또 하나의 중요한 기념물로는 'Basilica Giulia'라는 공회당을 들 수 있다. 건축학적 특성이 풍부한 이 공회당은 로마인들의 삶에 아주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는 중요한 회의가 열리고, 국가의 공공업무나 법률업무가 수행되었다. 이 공회당은 카이사르가 옛 셈푸로니아 공회당 터 위에 지었기에 그의 이름 'Julius(이탈리아어로는 Giulio)'를 따서 'Basilica Giulia'라고 부른다.

남아 있는 원주는 'Foro'에 부속된 건물로는 마지막 것으로 기원후 608년에 완공되어 비잔티움의 포카 황제에게 헌정되었다. 그리고 레질로 호수에서 타르퀴니 왕국에 대한 승전소식을 맨 처음 전해주었다는 전설적인 인물들로서 트로이 헬레나의 형제들인 카스토레와 폴루체를 모시는 신전이 여기에 있었다. 또 그 옆에는 베스타 신전이 있었다. 이 신전에 모셔져 타오르는 불꽃은 나라와 가정에 필요한 불의 영원성을 상징하였다.

191년에 마지막으로 재건축된 이 신전의 폐허 뒤에는 신전을 지키던 처녀들의 숙소가 있었다. 처녀들은 신성한 불을 숭고하게 보전할 의무가 있었다. 막중한 임무였다. 따라서 그들은 그에 따른 권위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30년 동안 정숙을 지키며 업무에 충실하고 나서야 드디어 결혼을 할 수 있었다니, 다 늙어서 어쩌란 말이었을까? 그 여인들은 한번 한 서원을 파기하면 벽 안에 산 채로 감금되었다.

베스타 신전 왼쪽에는 카이사르 제단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카이사르가 화장되었다. 그 옆에 있는 나지막한 단상에서 카이사르의 죽음을 애도하며 로마인의 단결을 호소하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들리는 것만 같다. 포로의 저쪽 끝으로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부모였던 안토니오와 파우스티나의 신전이 고린트 양식의 원주로 서 있다. 기원전 141년에 건축되어 나중에는 미란다의 성 로렌초 성당이라는 이름의 그리스도교 성당으로 되었다. 전면은 1602년에 건축되었다. 그 외 비너스와 로마의 신전이 허물어진 장소에 중세기의 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가 세워졌다.

포로 로마노를 보고 있노라면 역사란 시간 속에 존재했다가 묻히고 또 다시금 살아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겹겹이 쌓인 유물들은 어느 시기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역사적 가치가 달라진다. 진실을 밝힌다고 한 층을 걷어내보니 그 밑에 다른 진실이 숨어 있고, 또 한 층을 벗겨보니 또 다른 진실이 있다. 층층마다 갖고 있는 역사적 진실을 맨 위에 있는 층이 사정없이 짓누르고 있는 셈이다. 로마 문화의 면모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일순간 땅 밑으로 가라앉았던 폼페이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특성을 이 포로 로마노에서 느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기원전 8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포로 로마노의 모습을 먼 훗날 우리의 후예들은 또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아무튼 포로 로마노는 로마뿐만이 아니라 로마가 접촉했던 모든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바꾸어왔다. 팔라티노, 캄피돌리오, 오늘날 대통령 궁이 있는 퀴리날레 언덕들이 만나는 적당히 침하된 지역에 로마인들이 삶의 광장을 설립함으로써 이 세 언덕에 살고 있던 족속들을 아우를 수 있었다. 일상의 모든 활동을 이곳에 집중하고 또 이곳에서 진행하였으니, 이곳은 곧 문화, 정치 및 공공 시민생활의 중심지였다.

열린 문화의 터전에서 열띤 토론을 전개하고 원칙을 세우며 위대한 결정을 내리는 역사의 초석을 로마인들은 성공적으로 세웠던 것이다. 도량형을 정하고 화폐를 발행하는 일까지 그들은 이곳에서 합의정신에 바탕을 두어 결정해나갔다. 손가락 열 개를 이용해 나타내는 숫자, 거리를 잴 때 보폭과 손바닥 넓이를 이용하는 방법, 재산의 양을 측정할 경우 가축, 특히 양의 머리 숫자가 이용되었다. 라틴어의 'pecunia(돈)'라는 단어가 'pecora(양)'에서 파생된 것을 생각하면 재미있지 않은가?

로마는 세력이 강해지면서 영토를 확장해갔고, 많은 이민족들을 지배하면서 그들에게 큰 변화를 주기도 했지만, 로마 자체도 여러 가지 면에서 변할 수밖에 없었다. 포로(foro) 역시 옛날의 포로가 아니었다. 그 의미가 많이 쇠퇴하여 게으른 자들이 모여 잡담이나 늘어놓으며 시간을 보내는 장소로 변질된 것이다.

콜로세움 가까이 이르면 오른쪽으로 마센치오 공회당의 원주들이며 건물 잔해들이 위풍을 자랑하고 있다. 그 벽면에는 대리석 판에 새겨진 지도 네 개가 부착되어 있다. 한눈에 로마의 발전사를 볼 수 있는 지도들이다. 역사적 순서상 콜로세움에서 베네치아 광장 방향으로 보면 좋겠다. 이 지도들은 로마가 창건된 기원전 8세기 때의 모습에서부터 세력이 가장 크게 확장되었던 트라야노 황제가 죽은 117년까지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이 지도들을 바라보면 로마인들이 "로마는 곧 우주다"라고 자만하며 떠들어대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 베네치아 광장 근처에 드높이 서 있는 트라야노 원주에 새겨진 황제의 전승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지 않은가?

로마의 위세를 멋지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기념물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있다.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근처에 세워진 이 개선문은 315년에 건축되었다. 마센치오에 대항해 거둔 최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다음 얻어진 승리라 그에 대한 해석도 자연스레 아전인수격이다. 아무튼 이 개선문은 이후의 수많은 개선문들의 모형이 되어왔음이 분명하다.

로마는 그 전체가 역사적인 도시지만, 특히 이 지역은 문화재 보호구역이기도 하다. 여기에선 돌멩이 하나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탈리아를 여행한 사람이라면 가는 곳마다 보게 되는 유물에 압도당한다. 그러기에 심지어는 질투심 같은 기분도 느껴진다. 조상을 팔아먹고 산다고 욕하는 것도 어느 면에선 이 질투심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엔 이탈리아인들은 조상을 팔아먹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빛난 얼을 영화롭게 하고 있다. 돌멩이 하나라도 역사성이 인정된다면 보석처럼 여기는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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