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야경

중앙탑

by KimPaulus 2014. 6. 20.

탑평리 칠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 가운데 유일한 칠층석탑이며 높이도 14.5m로 가장 높다. 10여 매의 크고 긴 돌로 지대석을 이룬 위에 두 층의 기단을 쌓고 탑을 올렸다. 두 층 기단의 면석과 갑석은 모두 여러 장의 편편한 돌로 짜맞추어졌고 네 모서리와 그 사이 면에도 각각 3개와 2개씩 기둥이 새겨졌다. 아래층 기단 갑석의 윗면에 각진 굄과 둥근 굄이 두 단을 이루었고 위층 기단 갑석의 윗면에 각진 굄 두 단이 놓여 탑신부를 받는 점, 그리고 위층 기단의 갑석 아랫면에 부연()이 표현된 점 등은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 모습이다. 한편, 아래 위 기단 갑석의 윗면이 마치 지붕돌 윗면처럼 물매져 있는 점은 다른 데서 보기 드문 모습이다.

몸돌도 아래층은 여러 개의 석재로 짜맞추어졌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구성하는 돌의 수가 줄고 간략하다. 즉 1층은 네 모서리의 기둥과 면석이 모두 다른 돌이며 면석도 두 장을 이어 맞췄다. 2층 이상에서는 모서리에 기둥을 새긴 편편한 돌 넉 장을 엇물려 짜거나 앞뒤 양면에만 기둥을 새긴 판석을 세우고 나머지 면은 그냥 편편한 돌로 면석을 삼았다. 6층과 7층에서는 몸돌 자체가 한 개의 돌이다.

마찬가지로 지붕돌도 1층의 경우는 윗면과 받침이 각각 4개씩, 모두 8개의 돌로 짜맞추어졌으나 위로 올라가면서 전체가 2개의 돌로 이루어졌고 6층과 7층에서는 한 돌이다. 지붕돌 아래의 층급받침은 모두 5단이며 각 층 지붕돌 윗면에 각진 굄을 두 단 만들어 위층 몸돌을 받도록 하였다. 지붕돌 윗면은 경사가 밋밋한 편이며 추녀가 수평으로 이어지다가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들렸다. 귀퉁이마다 풍령을 달았던 구멍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을 이중으로 두었으며 그 위에 복발과 앙화를 올렸다. 노반을 이중으로 만든 것은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노반석 받침의 네 모서리가 다른 신라시대 석탑들처럼 수직으로 내려오지 않고 가운데가 불러진 형태여서 고려시대에 보수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높이에 비해 너비가 좁아서 뾰족하고 호리호리하게 치솟은 느낌이 강하고 웅대함이나 든든한 안정감보다 상승감이 두드러지는 탑이다. 이 탑은 1917년에 무너질 위험이 있어서 전면적인 해체 복원공사를 거쳤다. 그때 6층 몸돌에서 기록이 있는 서류조각과 구리거울 두 개, 목제칠합과 은제사리합 등이 나오고 기단부에서는 청동제 뚜껑이 달린 합 등이 나왔다. 은제사리합 안에는 사리가 담긴 사리병이 있었고 주변에도 사리가 몇 알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각 유물이 만들어진 시기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특히 구리거울 두 점은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려시대에 다시 탑을 열고 사리장치를 봉안했다고 여겨진다. 한편, 그때의 해체 복원이 완벽하지 못해서인지 원형과 달라진 부분이 생겼는데 기단 면석의 기둥 간격이 고르지 못한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국보 제6호이다.

탑평리 칠층석탑의 주변은 옛 절터이다. 지금은 공원처럼 말끔히 정리되어 충주사람들의 쉼터가 되었는데 그전에는 대부분 밭이었으며 민가도 있었다. 근처에서 네모진 초석들이 발견되었고 기와조각도 많이 나왔다. 지금도 탑 바로 앞에 석등의 하대석이었을 팔각연화문 석재가 하나 놓여 있다. 건물의 흔적이 주로 탑의 북쪽으로 펼쳐진 공간에서 나온 것으로 미루어 탑을 앞세우고 남쪽으로 향한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절 이름과 언제 창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이곳에서 나온 수막새 기와 가운데 연꽃잎을 은행알 모양으로 도톰하고 뾰족하게 새겨 고구려 와당을 닮은 것이 여럿 있고 또 가까운 곳에 고구려비가 있는 점 등을 들어 고구려 절이었으리라는 추측도 있고 그전에 백제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또 고구려 이후에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 지은 절이라는 설도 있다. 다만 발견된 유물들로 보아 고려 때까지도 존속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1970년대 초 홍수가 나서 탑 근처의 민가가 모두 물에 휩쓸렸다. 이때 복구를 하면서 부근을 불도저로 밀어 절터의 흔적이 많이 흩어졌다고 한다.

탑평리 칠층석탑 바로 옆으로는 남한강이 흐른다. 한 시기 전, 남한강을 따라 오르내리던 뱃사공과 떼꾼들은 이 탑을 이정표로 삼기도 했을 것이다. 신경림 시인은 이 탑 옆을 오가던 중학생 시절 강변길의 아름다움을 회상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은 탑이 있는 언덕에 앉아 내려다보던 이른 가을강이었다. 이때가 장마 뒤여서 물도 가지껏 많아지고 뗏목도 제철이었다. 가다가 또는 오다가 우리는 으레 탑이 있는 언덕에 앉아 한참씩 쉬었다. 다섯 대씩 또는 열 대씩 뗏목은 무리를 지어 내려갔다. 한 뗏목꾼이 목청껏 소리를 뽑으면 다른 뗏목꾼이 받고, 소리는 강과 언덕에 찌렁찌렁 울렸다.” 그때만 해도 근처 어디든 파기만 하면 기왓장이 나왔다고 한다.

탑평리 칠층석탑에서 찻길 건너 서쪽으로 잇닿은 중앙탑면 누암리 일대에는 삼국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 수백 기가 흩어져 있다.

'야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륵대교  (0) 2014.06.21
우륵대교  (0) 2014.06.20
탄금호  (0) 2014.06.20
바램  (0) 2014.06.17
공원 야경  (0) 2014.06.1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