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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

소쇄원

by KimPaulus 2016. 5. 18.

조선 중기에 건축된 한국 전통의 별서정원.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에 있다. 다듬지 않은 자연과 어우러진다는 조선시대의 특유의 조경 문화를 대표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별서 양식 중에서 그나마 제대로 유지되고 있는 대한민국 내 몇 안 되는 정원이기 때문에 조경시험에서 자주 나오는 이름들 중 하나다.

 

200852일부로 사적에서 명승으로 재분류되어, 명승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쇄원의 '소쇄(瀟灑)'는 맑고 깨끗하다는 뜻의 옛날 단어로 중화권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이다. 또 맑을 소()자나 뿌릴 쇄()자는 인명에서나 아주 가끔 발견될 정도로 현대 한국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한자이다.

 

조선 중기의 선비 양산보(梁山甫)가 소쇄원을 지었다. 양산보는 본래 조광조의 제자였으나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죽음을 당하자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고향인 창평(담양군의 일부)으로 내려와서 은둔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정확한 건축연대를 두고 논란이 있다.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인 하서 김인후가 중종 23(1528)에 소쇄원에 올라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란 시를 지었는데 여기에 간접적인 기사가 있다. 또한 송강 정철이 지은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이란 시에서는 자신(정철)이 태어난 해에 소쇄원이 지어졌다고 언급했다. 정철은 중종 31(1536)에 태어났으므로 소쇄원도 1536년에 지어졌단 소리가 되는데, 그러면 김인후가 지은 <소쇄정즉사>와 내용이 충돌한다.

 

면앙정 송순이 소쇄원을 두고 지은 시가 중종 29(1534)에 나왔기 때문에 정철이 언급한 내용은 착오일 것이다. 대체적으로 김인후의 시를 바탕으로 해서 1520년대 중후반부터 건축이 시작되어 1536년 정도에 완공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본래 은둔을 위해 지은 건물이지만, 워낙 풍경이 좋은 곳이라 수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찾았고 문학과 학문연구의 산실이 되었다. 김인후, 정철, 송순 이외에도 의병장으로 유명한 제봉 고경명, 이황과 사단칠정 논쟁을 한 사람으로 유명한 유학자 기대승 등도 소쇄원을 찾아와서 양산보와 교분을 나누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군이 담양으로 쳐들어와서 소쇄원에 불을 놓아 양산보가 지은 소쇄원은 소실되었다. 칠천량 해전으로 원균이 수군을 말아먹고 전라도 땅으로 왜군이 침입한 탓이었다.

 

이후 양산보의 손자인 양천운이 소쇄원의 복구를 시작해서 현손인 양경지 때에 상당 부분 복구되었지만 수많은 조선 중기 학자, 문인들이 보고 즐기던 경치와 정원이 소실되고 이후에 재건된 것이 지금까지 보존되었으므로 안타깝다. 그래도 명종 3(1548) 김인후가 <소쇄원사십팔영(瀟灑園四十八詠)>이라는 시를 지으며 꽤 자세하게 서술한 탓에 상상 정도는 가능하고, 영조 51(1775)에 간행된 <소쇄원도(瀟灑園圖)>라는 판화를 <소쇄원사십팔영>과 비교할 수 있기에, 원형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다른 한국 내 전통 정원들보다는 그나마 상황이 낫다. 복원한 소쇄원과 <소쇄원사십팔영>을 비교하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데, 이런 자료들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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