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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사

김대건 신부님의 마지막 회유

by KimPaulus 2013. 12. 29.

1846년 9월 16일(음력 7월 26일)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수선탁덕(, 첫 번째 성직자라는 칭호) 김대건(1822~1846)은 한강 새남터(지금의 노량진 백사장)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다. 김대건은 독실한 천주교 집안출신으로, 그의 부친인 김제준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103위의 성인과 300만에 가까운 신자를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발전은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기꺼이 목숨을 바친 많은 순교자들의 피 흘림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 성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인 최초로 서양 학문을 배우기 위해 유학한 학생이며, 라틴어와 프랑스어, 중국어, 서양음악, 그림 등을 구사하고 활동한 국제인이자 여행가였다.

1836년 김대건이 신학생으로 선발되기 전까지의 어린 시절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내포 지방의 솔뫼(현재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과 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전한다. 김대건의 출생지는 일반적으로 충청도 솔뫼라고 알려져 있는데, 경기도 용인 굴암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린 시절의 삶이 정확하게 그려지지는 않지만, 김대건 집안이 솔뫼에서 세거하다가 천주교 박해를 피해 거주지를 옮겼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김대건이 출생할 무렵, 그의 집안은 천주교 박해로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증조부인 김운조가 1814년 해미에서 옥사했고, 종조부 김종한은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대구에서 순교한 상태였다. 김대건 가족들은 박해를 피해 서울 청파로 이주하였고 이후 용인에서 거주했다. 용인으로 이주한 뒤에 그의 집안 형편은 상당히 어려웠다. 부친인 김제준은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갔고, 어린 김대건은 제대로 먹지 못해 발육 상태가 매우 좋지 못했다고 한다. 영양실조로 잔병치레하는 일이 예사였고, 그로 인한 허약함은 청년 시기까지 이어졌다. 훗날 중국에서 신학공부를 하는 동안 신부들은 김대건이 제대로 신학 공부를 마치고 사제가 될 수 있을까 염려했다고 전한다.

 

김대건은 집안의 영향으로 태어나자마자 천주교를 접했다. 집안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데는 백부 김종현의 영향이 컸다. 김종현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모든 가족들에게 전교하였다고 한다. 이때 증조부 김운조를 비롯하여 조부인 김택현 등이 입교하였고 조부는 1830년에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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