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경

공주 공산성

by KimPaulus 2014. 10. 27.

 

금강변 야산의 능선과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동쪽과 서쪽에 보조산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 흙으로 쌓은 것을 임진왜란 직후에 돌로 다시 고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진남루(鎭南樓공북루(拱北樓) 등의 남문·북문은 남아 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았다. 적에게 보이지 않게 누각없이 만든 암문(暗門),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 고대(高臺장대(將臺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도 남아 있다.

 

백제 당시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고 불렀으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산성이라고 불렸으며,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문주왕 이후 성왕 이전까지 수도 웅진(熊津)을 수비하기 위하여 여러 성을 쌓았던 동성왕 때로 짐작되고 있다. 하지만 웅진 천도 이전에 이미 성책(城柵) 시설이 있었다는 견해도 제기되어 있다.

 

성벽의 둘레는 2.2정도인데, 돌로 쌓은 부분이 약 1.81이고, 흙으로 쌓은 성벽은 약 390m이다. 성벽은 2중으로 축조되었지만, 만하루(挽河樓)터 주변에는 동성왕이 쌓았다고 전하는 무너진 성벽이 있어서 모두 3중으로 축조된 셈이다. 이것은 규모를 축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산성 북쪽의 영은사(靈隱寺) 밖에도 높이 7.4m, 길이 43m의 성벽이 2중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돌 홈통인 석루조(石漏槽) 2개가 있고, 그 위에는 너비 2m의 수구문과 문의 주춧돌 2개가 남아 있다.

 

흙으로 쌓은 성벽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후대에 고쳐 쌓았을 가능성도 있다. 높이와 너비는 일정하지 않은데, 대체로 높이는 1m이고, 너비는 아랫부분이 8.5m, 윗부분이 3m이다. 성 안에는 깊이 약 2m의 호()가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돌로 쌓은 성벽은 가운데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을 돌로 쌓는 협축(夾築) 방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다만 일부는 속을 다지고 겉을 쌓은 내탁외축(內托外築)을 한 구간도 있다. 협축으로 쌓은 성벽의 윗부분 너비는 약 0.7m 정도이며, 안쪽에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백회를 발랐다. 진남루 주변에 사용된 돌은주로 긴 네모꼴이나 네면이 같은 네모꼴인데 반해, 영은사 밖에 사용된 돌은 비교적 큰 편이다. 나머지 구간은 대체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산성의 주문(主門)은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이다. 진남루는 정면 3, 측면 2칸의 초익공(初翼工) 팔작지붕 누각이며, 공북루는 1603(선조 36)에 옛 망북루(望北樓)터에 세운 것으로 고주(高柱)를 사용한 정면 5, 측면 3칸의 2층 다락집이다. 서문은 1975년에 보수공사하였을 때 높이 4.4m, 너비 5,6m, 길이 17m의 크기를 확인하였지만 받침 부분만 복원되었고, 동문도 발굴 결과 길이 6.45m, 너비 2.46m였음이 확인되었다. 1859(철종 10)에 편찬된공산지(公山誌)에 의하면, 동문은 서문·남문·북문처럼 2층이었으며, 동쪽 외곽의 토성에도 약 4m 크기의 문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80년에 발굴조사한 결과, 만하루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건물이며, 임류각(臨流閣)은 백제 때 세운 건물이지만 파괴된 뒤 그 터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장대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2칸인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적심석만 남은 상태로,주변에서 백제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

 

그 뒤 1983년에도 조사되었는데, 길이 10.23m, 높이 1.67m, 너비 130.8m의 암문이 발견되었다. 현재 성 안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를 비롯하여 광복루·쌍수정·명국삼장비·쌍수산정주필사적비·주춧돌·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주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광지 은행나무  (0) 2014.10.29
단풍  (0) 2014.10.28
공주 공산성  (0) 2014.10.27
공주 공산성  (0) 2014.10.27
공주 공산성  (0) 2014.10.27

댓글